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외국어(특히 영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옵니다. 잘 할 수만 있으면 뭔가 큰 세상을 열어 주는 (아니면 보다 현실적으로 하고 싶던 job을 얻던가, 연봉이라도 올릴 수 있는) 기회인 것 같기도 하고, 막상 잘 하고 싶어 공부하다 보면 너무 넘기 힘든 큰 산으로 느껴 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실제 일하다 보면 많은 경우 별로 쓸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어쩌다 필요할 때 못하면 스스로를 위축시키는 경우가 있어 계륵 같다고 느낄 때도 합니다.
필자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 열심히 영어 단어 외우고 문법 외우고 했지만, 대학교 때는 영어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영어 공부는 학자가 되려는 친구들이 유학가서 공부하기 위해 주로 하는 것이지, 취직하려는 사람들은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요즘처럼 대학 졸업 후 입사 지원서에 높은 TOEFL 점수 또는 TOEIC 점수를 넣을 필요도 별로 없었습니다.
필자는 대학교 때 영어 대신 오히려 재미 삼아 다른 언어들을 조금 배웠습니다. 남산에 있는 독일 문화원 다니면서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운 독일어를 더 공부하고, 대학교 1학년 때는 러시아어는 어떻게 생겼나 하는 호기심에 학교에서 러시아어 기초 과정을 수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을 하니, 처음에 어쩌다가 외국 사람들과의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영어를 쓸 일이 있는 부서에서 일하게 되어서, 영어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 때 영어를 잘 하고 싶은 욕심에 나름 영어 단어 다시 외우고, 출퇴근시에는 EBS 영어 프로그램 들어가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특히 듣기, 말하기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1년 동안 나름 이쪽에 집중해 공부한다고 했는데 1년 후 TOEFL시험 다시 보니 Listening 점수가 딱 1점 올라가서 허탈해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 무렵이던가 주재원으로 계셨던 직장 선배님에게 영어를 공부하는데도 잘 안 는다고 하소연하니까, 그 선배님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죽도록 열심히 해 보았냐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그렇게는 안 해 봤으니까 할 말이 없기는 합니다.
그러다가 외국에서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유학 준비를 했고, 입학에 필요한 영어 시험 점수(GMAT, TOEFL)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취득했으나, 실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매일매일 영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프랑스에서 MBA를 했습니다만, 학교에서는 영어로 모든 수업이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다양성과 세계화를 지향하는 독특한 학교 특성에 따라 졸업 조건으로 영어 이외의 다른 언어 2개를 어느 정도 해야 한다는 요건이 있었습니다(그 중 하나는 유창하게 해야 하고, 제3언어는 기본적인 생존 외국어 수준이면 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 같은 경우는 한국어(당연히)와 불어를 선택하여 MBA 과정 중 틈틈히 (저처럼 불어를 선택한 학교내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근처 학원 다니면서 불어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유학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영어였습니다. 외국에서 접한 영어는 우리가 한국에서 책 읽고 CNN International News 보면서 공부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발음은 출신 국가별 악센트가 들어가서 조금씩 달랐지만, 대부분의 모든 친구들이 (Native English speaker가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말을 알아 들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저는 수업 시간에 놓치는 부분도 많아서 수업 내용을 흡수하는 것이, 마치 다 익지 않은 생쌀을 먹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옆에 친한 외국인 친구가 있어서 수업 끝나고 이해 못한 내용을 물어 보건 했는데, 항상 친절하게 가르쳐 주던 그 친구가 생각납니다. 또 그 때 알게 된 것인데, 듣기, 말하기 능력만 차이 나는 것이 아니라, 독해의 경우도 Native English Speaker의 경우 저보다 최소 2~3배 정도는 속도가 빨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튼 유학 시작하자마자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있으니까, 학교에서 만난 프랑스 친구, 독일 친구가(모두 여자들이었네요) 저에게 3개월이면 잘 하게 될 거라고 희망을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자기들이 그랬던 경험담처럼요. 그런데 왠걸… 제 생각에는 3개월이 아니라 졸업할 때까지도 듣고 말하기가 크게 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한국어와 서양어의 언어 구조 차이, 그리고 말하기 싫어하고 말에 서투른 한국 남자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느낀 경험이었습니다. 언어는 자연스럽게, 어쩌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듣고, 말 해야 하는데 우리는 (특히 저같은 한국 남자들은) 억지로 외국어를 외우면서 배우다 보니, 외국어 할 때마다 머리에서 프로그램을 돌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법 생각하면 발음을 못 알아 듣고, 개별 단어 발음에 집중하면 전체 문장을 놓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원래 언어 능력에는 선천적인 차이도 있고, 후천적인 성격 차이도 많이 작용하는데,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잘하고, 과묵한 사람보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더 잘하고, 대체로 한국말을 잘하면 외국어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완벽한 문법을 쓰고 싶어하는 조심스러운(?) 사람보다 “문법 틀리는 어때, 뜻만 통하면 됐지”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 따라 잘 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고, 그에 따라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어도 노력하면 할수록 느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도 대체로 언어는 공부라기보다는 생활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 언어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놀면서 체득한 사람의 언어 능력을, 나이가 들어서 억지로 단어 외우고 영어학원 다니면서 배운 사람이 따라가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벌써 10여년도 넘은 일입니다만, 어느 공식적인 큰 강연회에서 우리나라 외교부 차관이 영어로 연설하는 것을 듣는 기회가 있습니다. 외교부 차관이면 외교부 경력만 못해도 25년~30년 이상, 외국 주재원 경력도 15년~20년 이상이었을 텐데, 그 분의 발음이 우리 고등학교 때 책으로만 영어 공부하셨던 영어 선생님들(요즘 영어 선생님들하고는 다릅니다)이 해 주시던 청국장 느낌 나는 한국식 발음이어서 너무 친근하게 귀에 쏙쏙 들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것 밖에 못할까 했으나 다시 생각하니, 그 분은 저보다 한 20년 이상 먼저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어려서 입력된 발음이 오죽했겠나 생각되면서 공감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저 자신에 대한 위안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외국어를, 특히 영어를 Native speaker처럼 하려고 하는 욕심에서 all-in하는 것은 자칫 무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살다 온 경우가 아닌 경우, 아니면 영어 또는 다른 외국어를 업으로 삼고 사는 경우가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그 외국어를 자기의 결정적인 장점으로 삼으려 하기보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려는 전략도 의미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의 시간과 자원도 한정적일 수 밖에 없는데, 그런 맥락에서 잘하는 것에 집중하고, 다른 부분은 결정적인 약점이 안되는 수준까지만 시간과 자원을 투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외교부 차관하고 장관하고, 큰 나라의 대사하지 않습니까?
외국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나중에 그 외국어를 잘 활용할 수 있다는 실용적인 기대감과 더불어 추가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돌아보면 영어도 잘 못하면서 대학에서 독일어 배우고, 러시아어 배우고, 대학원에서 또 불어 배워야 했던 것들을 생각하면, (어차피 이 언어들도 아주 잘 하는 수준까지 가지도 못했고 쓸 일도 별로 없었는데,) 왜 현실적으로 좀 더 써야 할 일이 많은 영어에 집중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잘 했다 느낄 때도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언어 자체를 넘어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이해와 호기심을 늘리고, 다양한 관점에 대한 인식을 넓혀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간단한 인사말이라도 그 나라 말을 하게 되면 그 나라 사람들과 상호 친밀감과 다소나마 연대감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아무튼 영어건, 다른 외국어건, 그 언어로 먹고 살아야 하는 직업이라면 죽기 살기로 공부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가능하면 너무 스트레스는 받지 않으면서, 틈 날 때마나 꾸준히, 그리고 즐기면서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외국어 능력을 키운다는 보람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시각을 접한다는 즐거움을 함께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